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만수/선수 경력 (문단 편집) == 1982~1990년 == ||<#182132> [[KBO 골든글러브|[[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height=40]]]] [br] [[틀:KBO 골든글러브/포수|'''{{{#b58a5d KBO 골든글러브}}} {{{#ffffff 포수 부문 수상자 (1983~1987)}}}''']] || || [[파일:이만수 VS 김봉연.jpg|width=100%]] || || '''{{{#fff 프로야구 초창기 통산 100호 홈런 선착 경쟁을 벌인 이만수와 김봉연}}}''' || [[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대구상고]], [[한양대학교 야구부|한양대]]를 졸업하고 1982년 삼성에 입단했다. [[KBO 리그|한국프로야구]] 원년 멤버 중 한 명으로, [[삼성 라이온즈]]에서 프로 선수로 16시즌 동안 활동했다. '''프로 원년 멤버들 중에서 가장 오래 뛰었던 선수이다.''' 별명은 [[헐크]]. 등번호는 22번으로, 현재 삼성 라이온즈의 [[KBO 영구결번]]이다. 현재 삼성의 영구 결번인 [[양준혁]]의 10번도 다른 선수들이 단 적이 있었고[* [[허규옥]], '''[[장효조]]''', [[정성룡(야구선수)|정성룡]], [[김기태(1969)|김기태]], [[김주찬]], [[김승권]] 등 무려 7명이나 있다 삼성 선배인 장효조에 대한 일대기를 다룬 다큐에 마지막에서 양준혁은 자신이 10번으로 영구결번하였지만 그 10번은 사실상 장효조의 것이라고 말하였고, 이후로도 영구결번 관련 발언의 기회가 주어지면 어김 없이 장효조 선배의 10번도 공동 결번되면 좋겠다고 말을 하고 있다.] 삼성의 또 다른 영구 결번 번호인 [[이승엽]]의 36번도 그 이전의 선수들이 단 적은 있지만 이만수의 22번 만큼은 은퇴한 후에도 아무도 단 사람이 없어서 삼성 라이온즈 역사에서 유일하게 22번을 단 선수로 남게 되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OJF9qFdnYhw)]}}} || || '''{{{#fff 프로야구 개막전 MBC 청룡과의 경기에서 한국프로야구 1호 홈런을 때려내는 이만수}}}''' || '''한국프로야구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의 주인공이다. [[MBC 청룡]]과의 개막전에서 팀의 4번 타자 겸 주전 포수로 출전하여 1회에 2루타를 치며 타점[* 그 전 주자인 [[함학수]]는 상대 수비 실책으로 출루, 안타가 아니다.]을 기록했으며, 5회 초 두 번째 타석에서 홈런을 쳤다. 참고로 이만수는 이날 프로 출범 1호 타점과 1호 홈런을 기록한 [[이만수]]는 등나무 가구 세트를 받았다. 삼성의 초대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팀의 첫 전국구 스타라고 할 수 있다. [[장효조]]&이만수-[[양준혁]]-[[이승엽]]으로 시작되는 본좌 계보의 시작이었으며. 삼성의 역사는 이만수로 시작된다고 과언이 아니다. 삼성 본좌 라인 중 유일한 우타자이지만 삼성에서의 우승 경험은 전후기 통합 우승을 이룬 1985년 뿐, [[KBO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 경험은 없었다. || [[파일:최초 통산 100호 홈런을 달성한 이만수.jpg|width=100%]] || || '''{{{#fff 1986년 9월 2일 대구 빙그레전에서 KBO 최초 100호 홈런을 달성한 뒤 부상으로 받은 대우자동차 르망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만수}}}''' || [[https://m.sports.naver.com/kbo40/history/13|히스토리 13 이만수 vs 김봉연 '최초 100호 홈런 전쟁']] 국가대표 선수 출신으로 포지션은 포수. [[KBO 리그|한국프로야구]]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 100호 홈런, 200호 홈런, 최초의 [[트리플 크라운]]을 기록, 다양한 타이틀 및 통산 기록으로 [[대한민국]] 야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성실성과 노력으로 대표되는 선수로 1985년 삼성이 [[플로리다]]로 훈련을 갔을 때, 정규 훈련+야간 개인 연습+새벽 개인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고, 한 현지인은 머리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16시즌 동안 1449게임에 출장, 5034타석에서 타율 .296, 타점 861, 홈런 252, OPS .907을 기록했다. KBO 포수 역사상 최고의 타격을 보여준 포수이다.[* 보통 이 뒤에는 2018-2023년 양의지도 거론이 되나, 일반적으로 이만수가 한 클래스 이상 더 좋은 타격을 보여주었다 여겨진다. 이만수의 1983-1988년 wRC+는 대부분 170을 넘으며 그의 통산 wRC+가 159인데, 양의지는 본인의 타격 전성기인 2018-2023년 한정으로 이 정도 성적을 냈고 이마저도 지명타자로 자주 출장했다. WAR상으로 비슷한 성적을 올린 박경완이나 강민호는 임팩트 면에서 이만수에게 크게 밀린다. 그나마 박경완이 몇 시즌 정도를 이만수에 비견되는 훌륭한 타격 생산성을 보여주었으나 강민호는 거의 전 경기 포수 출장하며 대부분의 시즌을 wRC+ 130-140 정도를 치며 꾸준하게 성적을 올렸다.] 16시즌동안 3할 타율을 6번, OPS 9할 이상을 9번이나 달성한 레전드 중 레전드이다. 통산 OPS+가 155인데, [[양준혁]]과 [[이승엽]]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수치다. 더군다나 비교대상인 선수들이 1루수/지명타자인 것과 다르게 이만수는 포수였다! 역대 홈런왕 3번[* 그것도 83~85 3년연속으로 달성했다. [[장종훈]]과 [[이승엽]], 그리고 [[박병호]]만이 기록했다.], 타격왕 1번, 포수 골든글러브 5번을 수상한 레전드이다. 통산 wRC+가 159.0으로 외야수와 지명타자로 뛴 [[양준혁]]에 이어 역대 2위. [* wRC+,WAR은 리그 평균 스탯과 개인스탯으로 계산한 수치이고, 이 당시엔 용병도 없고 경기수도 적었으니 어느 정도 감안은 해야한다.] 포지션을 감안하면 더더욱 뛰어난 수치이다. 21세기 들어 KBO의 리그 평균 포수 wRC+는 단 한해도 100을 넘긴 적이 없으며, 전 시즌 평균하였을때 약 90정도에 불과하다. 이런 포수 포지션에서, 단 한 해만 wRC+ 159를 기록했다면 MVP 컨텐더로 불릴 만할텐데, 이만수는 통산 기록으로 159를 찍었고 80년대 평균하여 170을 넘겼으며, 커리어하이로는 무려 200을 두번 넘겼다.[* 베이징 세대 이후로 가장 뛰어난 포수로 극찬 받은 [[박경완]]의 wRC+가 이만수의 통산 wRC+보다 높았던 단일 시즌은 단 3회(97, 00, 04)뿐이고, 2010년대 가장 훌륭한 포수로 평가받는 [[양의지]](18, 19, 21시즌은 지명타자)와 [[강민호]](15)는 더 적다.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타자가 포수로 거의 전 경기를 출장해내기까지 한다는, 야구 만화에나 나올법한 선수였던 것. 여기에, 2020시즌에 이만수의 통산 wRC+보다 높은 단일시즌 기록을 낸 타자는 [[멜 로하스 주니어]]와 [[최형우]] 단 둘 뿐이다.] KBO 역대 최고의 포수를 넘어 역대 최고의 우타자로 부를 만한 선수이다. 특히 주목할 사실은 그의 볼넷:삼진 비율. 커리어 통산 4310타수 672볼넷 490삼진으로 10타수당 삼진 1개에 지나지 않을 만큼 까다로우면서도 파워를 겸비한 타자였다. 여기에 1982~1990년, 즉 이만수의 전성기로 한정지어 계산하면 그 위엄이 더더욱 빛난다. '''9년 평균 타 출 장이 .310 .399 .554에 OPS가 .953으로 동기간에 OPS가 0.9를 넘는 선수는 오직 이만수 뿐이며, wRC+는 무려 173.2에 9년 합계 sWAR은 49.77이나 된다!'''[* 당연히 동 기간 sWAR, wRC+, OPS 모두 1위인데, 이게 KBO 역사에서 얼마나 위대한 성적인지 실감이 안 난다면, 2010년대와 비교해보면 된다. 14시즌 이후 19년도 단 한해를 제외하고 항상 타고투저였던 2010년대 KBO에도 이만수의 .953보다 높은 누적 OPS를 기록한 선수는 박병호, 최형우, 김태균, 그리고 최정 단 4명 뿐... 경기수가 133경기(11, 12), 128경기(13, 14), 144경기(15~)로 확대되었음에도 이만수보다 높은 누적 sWAR을 기록한 선수는 [[최정]]과 [[최형우]] 단 두명 뿐이다! 2010년대에 3000타석 이상을 들어선 선수들만 놓고 비교한 비율 기록을 살펴본다면, '''이만수보다 높은 누적 wRC+를 기록한 선수는 단 한명도 없고, wOBA를 기준으로 해도 박병호 뿐이다.''' 그나마 1시즌이라도 규정타석을 채운 선수들까지 합쳐서 계산한다면 2시즌여를 뛴 [[윌린 로사리오]]와 3시즌을 뛴 [[에릭 테임즈]]가 포함될 뿐이다.] 누적홈런은 183개로 당연히 1위, 그러면서도 BB/K가 1.19나[* 삼진을 불명예로 여기던 시절이므로 의외로 순위는 22위지만, 이만수보다 볼삼비가 좋은 선수들 중 김봉연을 제외하면 타석 대비 홈런비율이 3%를 넘는 선수도 한명 없다.] 되는, 그야말로 타격의 신이라 불릴 수준이었다. 당시 리그에서 [[알버트 푸홀스]]나 [[미겔 카브레라]], [[마이크 트라웃]]이나 다름없는 엄청난 타자였음이 명백하다. KBO 리그 성적만 가자고 [[이대호]]와 단순 비교해보아도, 통산 wRC+는 이만수가 159, 이대호가 141이고[* 다만 이대호는 해외에 나가있던 2012~2016의 기간이 빠진 수치다. ][* 이대호의 [[NPB]] 통산 wRC+는 151, MLB는 102이다. KBO 통산 wRC+보다 NPB 통산 wRC+가 더 높다.], 누적 sWAR은 5034타석을 소화한 이만수가 65.29이고 7072타석을 소화한 이대호가 56.71로 둘 다 이만수가 우위다 여기에 144게임으로 환산하여 비교하였을때, 커리어하이 기준으로도 (각각 가중출루율, wRC+, sWAR/144G)84 이만수가 0.467, 204.6, 9.00이고, 10이대호가 0.482, 192.4, 9.55이다. 이만수는 커리어 통산 wRC+ 200 이상을 두번이나 기록했는데 반해 이대호는 단 한번도 그런 적이 없다. 물론 이만수가 뛰던 때는 외국인 선수가 없었고 경기수도 적었으며 비율스탯 이런 거 다 떠나서 80년대 선수 이만수랑 21세기 선수 이대호를 비교하면 절대적인 기량은 이대호가 낫겠지만, 절대적인 기량 비교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 야구선수 각자가 현역이었던 시절에 한 리그에서 어느 정도로 가치 있는 플레이를 했는가, 얼마나 지배적인 선수였는가 비교하는 게 wRC+, WAR 등 야구의 스탯이며, 그런 스탯을 놓고 비교해 봤을 때 현역 시절 이만수가 현역 시절 이대호보다 지배적인 타자라는 사실만을 나타낼 뿐이다. 100년 전에 뛰었던 선수들도 당시 MLB의 수준, 흑인 선수가 없었다는 점 등을 고려해 보면 21세기 현대 야구에서는 아무리 잘 잡아봐야 한 팀의 주전급 멤버 수준이지만 각각 투타에서 GOAT 대접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각자 동등한 조건에서 겨루면서 다른 시대의 그 누구보다도 한 시대의 리그를 압도했던 선수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만수도 그런 격이다.[* 이대호가 뛰었던 2000년대~2010년대 KBO는 이만수가 뛰었던 1980년대 KBO와는 다르게 선수들의 기량이 상향평준화되어 양학이 힘든 리그였으니 wRC+ 200 이상을 찍는 건 힘들지 않았겠냐는 의견도 있지만 15시즌의 [[에릭 테임즈]]가 wRC+ 222.3을 찍었으니 메이저 리그에서 주전급으로 뛸 만한 기량을 갖춘 선수라면 2010년대 이후 KBO에서 wRC+ 200을 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하여간 이대호가 wRC+ 200을 넘겨보지 못한 건 wRC+ 200이라는 수치가 [[4할 타자]]나 0점대 방어율 선발 투수처럼 구조적으로 불가능해서가 아니라(그 MLB에서도 [[애런 저지]]가 2022시즌에 wRC+ 200을 넘겼다.) 전성기 이대호의 기량이 17~19시즌 테임즈처럼 메이저리그에서 주전으로 뛸 만한 급이 아니어서다. 물론 메이저리그에서 풀시즌 주전으로 뛸 급의 선수라면 굳이 KBO에서 뛰지는 않을 테니 wRC+ 200은 앞으로도 보기 힘들 것이다.] 심지어 국민타자 [[이승엽]]의 95~03 시즌 9년과 비교해봐도 '''동급이라 할 수 있다.''' 9년 평균 이승엽의 wRC+는 170.9, 이만수는 173.2. sWAR로 비교하면 이승엽이 5005타석을 들어서고 56.83승을 기록했는데 이만수가 3200여 타석을 들어서고 49.77승을 기록했다. 포수로써 수비 보정이 이루어졌더라도 타석수가 2000타석 가까이 차이나고 7승 더 기록했다면, 물론 시대의 차이는 있지만 동급으로 간주해도 무방한 수치이다. 물론 이승엽 역시 이대호처럼 전성기에 NPB에 나가 있었던 시기가 존재하고, NPB에서도 부상 등으로 부진하기 시작한 2008년 이전까지 시기 (2004년~2007년) 중 적응기인 2004년을 제외하고는 1인분 이상은 하는 타자였기에 wRC+ 면에서 다소 손해를 보긴 했다. 95~96 시즌 이승엽은 홈런타자로 각성하기 전이라 wRC+가 그다지 우수하지 않다. 물론 WAR로 따져보면 그 당시 이승엽도 좋은 타자였던 건 맞지만 95~96시즌 이승엽보다는 04~05 시즌 이승엽이 월등하게 좋은 타자였다. 현재까지도 이만수의 선수 시절 수준의 타격 성적을 냈거나 앞으로 비슷한 반열에 오를 만하다고 보이는 포수는 나오지 않았다. 타고투저가 우세한 현재의 KBO 리그와 달리 이만수는 프로 선수 생활 1982~1997년까지 거의 15년 이상을 [[투고타저]] 시대에 뛰었던 선수였다. 게다가 막바지인 1993~1997년에는 포수로 뛴 경기가 단 5경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것을 제외하고 순수 포수로서의 성적을 보면 통산 성적보다 훨씬 더 좋다. 통산 타율이 .296인데 포수 시절인 1982~1992년까지의 성적만 가져오면 통산 타율이 무려 .304에 달한다. 알다시피 포수로서의 성적으로 본다면 '''현재 KBO 리그에서 최고 포수로 인정받는 양의지가 본격적으로 타격에서 정상급 성적을 내기 시작한 2018년 이전, 2000타수 이상의 KBO리그 선수 중 포수로 뛴 경기를 기준으로 할 때 타율 3할을 을 넘긴 포수는 이만수, 단 한 명 뿐이었다.''' 21세기에 [[강민호]]와 [[양의지]]가 타자로서도 좋은 성적을 내고 있지만, 포수 기준 OPS를 10할을 넘기는 대활약을 한것은 양의지도 프로 14년차인 2018년에야 처음 기록한 것이며, 강민호 역시 2015년 한번 뿐이다. 강민호가 2015시즌에 이만수를 제치고 포수 단일시즌 OPS 역대 1위를 기록했지만 이때는 타고투저 시즌인걸 감안해야한다. OPS 0.900 이상을 기준으로 잡아도 양의지는 2018년을 포함할 경우 3시즌, 역시 강민호도 3시즌 뿐이다. 반면에 이만수는 OPS 1.000 이상 시즌이 2시즌, .900 이상 시즌은 '''10시즌'''이다. 그것도 포수로서 뛰었던 1982~1992년 사이에 모두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이만수의 통산기록을 넘기려면 양의지나 강민호나 각자의 최고성적을 앞으로도 5년 정도는 지속해야 한다. 또한 타고투저로 인해 같은 OPS라도 wRC+, WAR 등에서 큰 손해를 보기 때문에 그 당시의 성적보다 더 좋은 성적을 올려야 비교가 된다. 그리고 이만수는 대졸 + 1년 유급으로 인해 프로야구 기준 통산 성적에서 전성기 2년 정도를 손해를 본 데다가 당시 경기수도 현재 144경기에 비하면 훨씬 적은 80~126경기 정도였기 때문에 그만큼 경기수, 타수에서 크게 모자란데도 저 성적이다.[* 강민호는 고졸 + 병역 혜택 등 더 많은 경기를 소화하는 환경이 되어 불과 13시즌만에 이만수의 17시즌 타수 기록을 뛰어넘었다.] 타격 성적만 보면 이만수는 다른 선수와는 아직까지 비교가 불가능한, 그 정도로 압도적이다. 최근 양의지가 2018~2020년 모두 OPS 1.000 이상, wOBA .430 이상을 기록하면서 이만수의 기록을 노리고 있다만, 2021년 한국 나이 35세가 되는 양의지가 비율 기록으로써 통산 wRC+ 134.5를 150 이상으로 끌어올리고 은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경기숫자 차이 덕분에 누적 기록으로는 [[박경완]]과 이만수를 모두 넘어설 가능성이 크지만. 위대한 타자이지만, [[장종훈]]과 마찬가지로 한국시리즈에서의 불운의 선수이기도 하다. 그나마 1번의 우승이라도 있으니[* 이만수는 [[1985년 삼성 라이온즈 통합우승|1985년 통합우승]], 장종훈은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 그걸로 위안을 삼자. 하지만 삼성은 1985년 통합우승의 경우 공식적인 우승이지만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못했고 이만수를 보유한 삼성은 한국시리즈에서 '''0회 우승, 6회 준우승'''이라는 대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선수 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우승은 마침내 2005년에 월드시리즈에서 코치로 재직중이던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우승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다만 이만수가 뛰던 당시 삼성이 새가슴 팀이었다고 이만수 또한 새가슴으로 몰아가면 곤란한 것이, 이만수의 포스트시즌 성적을 보면 그는 절대 새가슴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통산 포스트시즌 타격 WAR은 스탯티즈 기준 1.88인데 이는 역대 포스트시즌 엔트리에 든 삼성 야수 중 1위에 해당한다. 참고로 바로 뒤가 1.85의 이승엽이다. 타율 .257은 포스트시즌이면 괜찮은 타율이고, 53안타는 팀내 역대 7위, 홈런은 7개로 2위, 33타점은 4위에 해당하며 그의 앞에는 [[이승엽]], [[박한이]], [[양준혁]] 등 왕조 시기의 후배들뿐이다. 즉 1980년대 포스트시즌에 참가했던 삼성 선수들 중 가장 좋은 포스트시즌 성적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은퇴하는 1997년까지 이만수는 포스트시즌 안타, 홈런, 타점, 득점 등 주요 지표에서 1위를 마크했으며, 이만수에 이은 팀내 PS 타격 WAR 2위는 장효조였는데 1.22로 엄청난 차이가 난다. 다만 병살도 7개로 1위였고[* 현재 삼성 포스트시즌 병살 1위는 진갑용과 양준혁이 8개로 공동 1위를 차지하고 있다.], OPS 같은 지표가 좀 떨어졌다는 건 특기할 점이다. 그리고 이만수의 포지션이 포수인 걸 생각하면 수비 기여도 및 클러치 상황까지 합한다면 총합 포스트시즌 WAR 또한 팀내에서 손꼽힐 수준이었을 것이다. 다만 투수들까지 합산한다면 투수들에게 밀린다.[* 투수 WAR 1위가 김상엽의 3.0이다.] 선수 시절 최악의 흑역사라면, 1984년의 [[트리플 크라운]] 달성 과정일 것이다. 당시 [[김영덕]] 감독이 이만수의 타율 1위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홍문종(야구)|홍문종]]을 '''9연타석 [[고의사구]]'''로 내보내는 노골적인 타이틀 만들어주기를 강행하여 트리플 크라운의 가치가 빛을 잃었고, 그 대가로 시즌 MVP도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나홀로 4승으로 맹활약한 롯데 [[최동원]]에게 내어주는 [[흑역사]]가 있었다. 뭐, 이만수는 이미 1년 전인 1983년 시즌에 MVP를 수상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만수는 당시 인터뷰에서 83년도는 본인이 받지 말아야 할것을 받아 의아했고, 84년은 당당히 받아야 할 것을 못 받아 불만이라고 말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